답사팀이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우정마을'이었다. 'Friendship'(우정)을 연상케 하는 이쁜 이름 덕분일까.
처음 방문하는 곳인데도 왠지 모를 정이 느껴졌다.
자루비노항에서 3시간 정도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내달려
도착한 우정마을은 집이며 길들이 이제 막 정비 작업을 마친 듯한
한국의 여느 시골 마을에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겨운
동네의 모습에 모두들 '와'하며 탄성을 지르는 사이, 우리가 묵게 될
우정마을 내의 '솔빈마당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
답사팀을 맞아주신 약간 검게 그을린 듯한 동평의 대표 김현동님과
아내 주인영님의 따뜻하고 환한 환영의 웃음 덕분에 마치
시골 친척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우정마을을 실제적으로 만들어낸 주인공들,
그 분들의 꾸밈없고 순박한 웃음 덕분에 여행의 피곤함이 다 달아났다.
우정마을은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1998년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세운 것을 2004년에 동북아평화연대가 이어받아 꾸준히 공들여 만들어온
'고려인 정착촌'이다. 33개의 가옥에 고려인이 27가구를 이루고 있고,
러시아인 3가구, 그리고 한국인 가정이 2가구였다. 집집마다
무공해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비닐하우스와 청국장 제조 공간이
있었다. 이미 우스리스크에서는 이 우정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 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고려인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한국인'이라는 이름 대신 역사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몇 대째 이역만리 타지 생활을 하고 있고,
'고려인' 임에도 우리말 대신 러시아말이 더 유창한 사람들.
그들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140주년 기념관'을 돌아보며, 고려인들의 지난 역사와
오늘에 대해서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인들의 러시아 연해주 이주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63년,
쇠잔해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해 시작된
이주민이 1870년대에 8,400명, 1923년도에는 무려 12,000명이 넘었다는
러시아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 시기에는 그 숫자가 더 늘어 23만명에
이르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그 비극적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강행되었는데,
그 해가 1937년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갑작스런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예상해서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들 3천여명을 간첩이라는 누명 등을 씌워 처형했다.
그리고는 일반 고려인들에게 불시에 명령서를 전달한 후 곧바로
'라즈돌로니에'역으로 끌고가 기차 짐칸에 타게 하였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 한복판에
내동댕이 치다시피 버렸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삶은 더욱 끔찍했다.
(이 이야기는 2004년 12월 16일자에 보내드린
'윤나라의 중앙아시아 여행스케치'를 참조 바람)
강제 이주 과정에서부터 정착하는 2년여에 걸쳐 죽은 사람만도
2만명이 넘었다. 토굴에서 짐승처럼 시작된 삶이었으나,
고려인들은 강인했다. 사회, 정치적으로 모든 것에 제한을
받으며 억압 속에 살면서도 중앙아시아를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킨 주역이 바로 고려인들인데,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놔도 풀이 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뒤 잘 사는 듯 했던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각기 독립하면서
또 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언어의 문제등으로 인해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연해주로의 재이주가 불가피하게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동 수단, 정착 비용 등 숱한 난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바로 이 난제들을 풀어가며 고려인의 재이주를 돕고 있는 곳이
'동북아 평화연대'이고, 마침내 우리가 방문한 '우정마을'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동평의 김현동 대표는 "구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연해주 재이주는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연해주의 하루는 길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서쪽 지평선 위에 해가 발갛게 걸려 있었다.
그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답사팀은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짙은 황토색 벽돌로 된 거의 같은 모양의 집들이 반듯반듯,
옹기종기, 깔끔하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우정로, 새마을로, 아리랑로...
한글로 만들어진 길 간판도 정겨움을 더했다.
아직은 적은 수이지만, 일단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그 부지런함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미 '안정감있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2004년 중앙아시아에서 보았던
절망감이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 저절로 '감사함'이 솟구쳤다.
특히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NGO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일신의 안위와 행복을 뒤로 한채
이곳에 들어와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며 고려인들을 위해
이 마을을 만들고, 또 재이주와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희망, 고려인의 희망, 연해주의 희망, 한민족의 희망이
이곳에서 이렇게 성큼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정마을에서의 이틀째 날 밤,
고려인 집에서 그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홉 명의 답사팀이 둘로 나뉘어 고려인 가족이 사는 집에 민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함께 상추를 뜯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또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설겆이며 뒷정리를 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가족 이야기, 텃밭 이야기, 하는 일 이야기,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이야기를 나누며 얼굴은
웃고 있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뭔지 모를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 올라왔다.
모처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안방을 내주고
자신들은 거실을 택한 고려인 주인 내외분의 마음을 받아,
더는 거절 못하고 깨끗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 누웠는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신 분들이 그 동안의 오래고 고된 삶의 짐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터전인 이 우정마을에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를,
또 더 많은 고려인들이 꿈의 정착을 통해 더이상 '이주'의 아픔을
겪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2, 제3의
우정마을이 계속 생겨나길 바라고 또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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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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