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 둘째날, 140명의 일행은 '민족의 명산' 묘향산을 향했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평양 시내를 벗어나자,
어느덧 익숙해진 '시골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우리의 70년대 시골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 들면서도 6월 햇살에 반사되는
그 눈부신 푸르름 때문이었는지 왠지 모르게 풍족해 보이고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넓고
푸르른 논밭, 쑥쑥 잘 자란 키다리 가로수들, 그 모든 풍경들이 뭔가 윤택한 느낌마저
들게 해주었다.
그러나 겉모습의 풍요로움과는 상반되게, 가는 길목 중간중간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버스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북녘 동포들의 얼굴과 행색에서는 궁핍과 궁기가 역력해
보였다. 가슴이 아파왔다.
이번 북한 방문은 말 그대로 '방문'이었다.
중앙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오지였지만 드나듦과 모든 시스템이 자유로웠던
곳에 견주어 북한은 같은 땅의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는 다른 체제 때문에
그 쪽에서 길잡이 하여 보여주는 것과 들려주는 것만 보고, 듣고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의 잣대를 기준으로 바라본 것일지도 모른다.
북쪽에서 '6.15 공동선언 5주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를 앞에 두고 140명이나 되는
우리쪽 민간인을, 그것도 중국 등 3국 경유가 아닌 직항으로 가는 특별전세기까지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니까...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우리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많은 것들을 열어
보여준 것 또한 사실이니까...
방문 이틀째가 되고 나니, 사진을 찍는 것이 첫날보다도 조금 더 어려워졌다.
사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안내하는 북측 관계자들을 통해 사진을 마구 찍지 말아달라는
주의를 듣긴 했지만, 150만 아침편지 가족들에게 내가 보고 접한 실상 그대로를 가감없이
올바르게 전해주고 싶다는 욕심과 '사명감' 때문에 한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양을 벗어나는 일정 때문이었는지, 함께 동행하여 안내하는 북쪽 관계자들이
이틀째부터는 "이번 방문에서 로상(노상)에서의 촬영은 호상간 합의 사항에 없었습네다."
라며 완곡하지만 강경한 어조로 사진 찍는 것에 대해 '불허'를 통보해왔다.
사실 평양 시내 촬영도 눈치를 살펴가며 어렵게 시도해 담아냈는데 평양 바깥 풍경은
더더욱 곤란해져 버렸다. 순간 난감함을 느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생각,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예의, 이런 것들을 생각하여 그나마 겨우 몰래 찍은
시골 풍경 두 장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드디어 묘향산에 다다랐다.
들어가는 길목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가슴이 탁 트여왔다. 푸른 나무들의 울창함이 평양에서의 딱딱한 건물들, 빨간 글씨들
때문에 조금은 경직되어 있던 마음을 한결 풀어주는 듯했다.
더욱 더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어딜 가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노래시키기를 즐기시는 기아대책 정정섭회장님의
재미있는 습관 덕분에 많은 북한 여성들의 노래를 즉석에서 들어볼 기회가 많았는데
하나같이 얼굴도 예쁘지만 노래도 잘하고 북한 사투리를 나긋나긋하게 구사해
여자인 나도 북쪽 여성들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버렸다.
묘향산에는 뛰어난 산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제친선 관람관'이었다. 이 국제친선 관람관이라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두 부자에게 전 세계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서울 여의도의 63빌딩
면적만큼이나 넓은 공간에 전시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따로 떨어져 세워진 두 개의
건물에는 700여 개의 방이 있고 방마다 진귀한 선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선물 하나를
1분씩만 감상한다 쳐도 1년6개월이 걸린다는 안내원의 소개에
돌아보기도 전에 기가 질려버릴 정도였다.
별천지처럼 꾸며진 커다란 방에 하나하나 놓여있는 진기한 선물들을 보고 있자니
묘향산을 들어오면서 느꼈던 신선함과 탁 트였던 마음이 다시 무언가 조금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대단한 것'들을 많이 모아 놓았는데,
그 대단함이 결국에는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드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너무 다른 공기를 맡으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다른 공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심하고 깊이 이해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수년전 우리에게 잠시 웃음거리로 회자되었던 '묘향산 해수욕'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묘향산에 거의 이르렀을 때
묘향산을 끼고 흐르는 '청천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뇌리에 번쩍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바로 그 '묘향산 해수욕'
에피소드였다.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어느 TV 기자가 북한의 어느 여성에게 "여름
해수욕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묘향산으로 해수욕을 간다"고 대답해, 그들의
'무지'를 웃음으로 받아넘겼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안내자 한 분에게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북한에서는 '해수욕'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 그 당시 북한 사람들은
거의가 그 단어를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추측이지만, 기자가 '해수욕을 어디로 가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자는 '해수욕'이란
단어에 대해 어림짐작을 했거나 '해수욕이 무엇입니까'하고 묻고 '물놀이'라 대답했을지 모를
기자에게 스스럼없이 '묘향산'으로 간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묘향산은 분명
'산'이지만 '물놀이'를 하기에도 충분한 곳이 틀림없음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
분단의 비극은 그렇게 한 민족인 우리들의 이념이나 생활 방식, 언어를 다르게
만들었고, 또 더 깊게는 고향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처절한 아픔과 한을 심어 놓았다.
묘향산에 가는 버스에 동승한 일행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다.
묘향산으로 향하는 2시간 동안 우리 버스 안에서는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차례가 되신 한 분이 나오셨는데 그 분은, 우리 5조의 조장을 맡은
기아대책의 안향선 본부장의 아버님 안승룡님(78세)이셨다.
안승룡님께서는 만감이 어린 표정으로
"지금 이 버스가 내 나이 15살에 떠난 고향땅 안주를 막 지나고 있다"며 목이 잠기셨다.
버스 안이 잠시 숙연해졌다.
묘향산을 향하는 내내 그 분의 표정이 무언가 비장함을 가득 담고 있는 듯 느껴졌던게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본부장께서 '55년이 지났지만 기억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거의 변함이 없어 고향인 안주 땅임을 바로 알아보신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막 쏟아지려고
할 때 당신 소개 차례가 돌아와버렸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그 분의 가슴 안에 쏟아버린 눈물이 얼마나 될까.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버스는 공교롭게도 '안주' 땅 도로상에 잠시 멈추었다.
용변 등 잠시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안승룡님에게는 이 기묘한 우연의 정차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1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밟게 해준 '슬프고도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분의 가슴에 고인 아픔과 한, 슬픔의 눈물이 얼마일지 나로서는 정말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승룡님은 분명 '행복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분 한 사람의 짧았지만 '귀한 행복'이 계속 이어져 둘, 셋, 넷, 열, 백, 천..
나중엔 7천만 모든 민족의 행복으로 번지고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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