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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분.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평양 순안공항에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혀있었던 그동안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고도 멀었다.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건너가 볼 수 있으리라고는
이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에게 있어 북한은 피안의 지대였다.
반공 교육 세대이기 때문에 '북한' 하면 왠지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왔고,
아직도 내 뇌리에는 초등학교 때 보았던 영화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 외치며
죽어가던 이승복 어린이의 절규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란 노래와 함께
오버랩 되어 맴돌곤 했다.

사실 북한 방문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병원 수술대에 올랐던 불과 한 달 여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최근 들어 '북한과의 인연'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두 달 전 아침편지에서 기아대책기구와 함께 '북한 라진 된장'을 판매하면서 북한과 연관된 일이
조금씩 시작되었고, 그런 연유로 고도원 이사장님도 그전부터 가지고 있던 북한 방문에 대한 희망을
더 자주 얘기하곤 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북한 방문의 행운을 거머쥐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온 금강산 여행 코스도 아니고, 중국 등 다른 곳을 경유해서 평양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천공항에서 평양으로 직행하는 특별 전세기를 타고 불과 55분의
비행 끝에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이라는 진부한 표현 말고는
달리 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2005년 6월 7일 오후 3시15분, 드디어 비행기가 평양에 도착했다.
이번 방문은, 이미 일부 언론에 보도된 대로, '기아대책기구'와 '우리민족 서로돕기모임'이
공동 지원하여 세운 '정성 수액공장' 준공식에 참가하기 위한 특별 방문이었다. '수액 공장'이란
한 마디로 병원 링거용으로 쓰는 '포도당 주사액 공장'을 생각하면 된다. 6.15 공동 선언 5주년에
즈음하여 가까스로 다시 재개된 남북 대화 및 교류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더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는 하나, 140명의 방문자 전원이 오로지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이렇게 특별전세기를 통해 평양으로 직접 날아간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방문자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이 드신 분,
그것도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의 경우는 더욱 절절해 보였다. 비행기내 좌석에
앉아계신 어른 중 몇 분은 남몰래 눈물을 훔치시는 것 같았다.

착륙후 비행기에서 내릴 때 트랩 위쪽까지 올라온 북한 관계자 두 사람이
우리 일행을 한 사람 한 사람 명단과 대조하면서 내리게 했고, 내 이름과 얼굴을 확인시킨 후
드디어, 평양 땅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평양의 햇볕은 뜨거웠고, 공기는 맑았다.
평양 땅을 밟은 방문 팀들의 얼굴 하나하나에서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감회가 엿보였다. 반가움, 신기함, 놀라움, 호기심, 긴장감 등등의 눈빛이 햇볕에 부딪쳐
번뜩이는 듯 했다. 나에게도 역시 그런 비슷한 감회가 교차되어 다가왔다.

트랩을 내려 너른 비행장을 둘러보니
다른 비행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고려항공'이란 이름의 북쪽 비행기와
'대한항공'이라는 남쪽 비행기가 나란히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무언가가 가슴 한쪽을 조금 싸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공항 건물 중앙 위쪽에는 TV를 통해서도 종종 보았던,
'평양'이라는 빨간 글씨와 함께, 10여 년 전에 사망한 김일성주석의 초상화가
거대하게 걸려 있었다.

많은 방문단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조별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와 최동훈 팀장, 고도원 이사장님은 5조에 편성되어 정해진 버스에 짐과 함께 몸을 실었다.
버스가 공항을 출발하면서 북한쪽 '안내원'들이 인사를 하였다. '민족화해협의회' 소속 간부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평양을 방문해주신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네다."
우리 방문단 일행도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북한 안내자의 말이 이어졌다.
"긴장하지 마시라요. 고저 내 집에 왔다, 내 고향집에 왔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3박4일을 보내고 가시라요." 다시 박수가 터지고 웃음이 뒤따랐다.
'긴장하지 마시라'는 안내자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버스 안에 앉아있던,
자신들은 긴장한 줄 모르고 긴장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쯤은 확실하게 녹여주었다.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내 눈에 평양 근교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곳의 모습은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기에 충분했다. 안내자의 말처럼 실제로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북한에서 만난 시골 풍경은 조금 남달랐다. 그러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현재 남쪽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시골을 방문한 느낌이라기보다 내가 살았던,
그러나 이제는 거의 사라진, 어린 시절의 시골 고향집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7,80년대로 되돌아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설명이 좀 될지 모르겠다.

북한에 도착해 우리가 제일 처음 들른 곳은 '만경대'였다. '만경대'는 이름 그대로
'만 가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고, '김일성장군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평양 시내를 어느 정도 벗어나 대동강을 만났고, 대동강 가를 따라 제법 서쪽으로
가다가 빠져나와 '만경대'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는 검정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입은 북한 여성
특유의 복장을 한 여자 안내원이 "반갑습네다" 는 인사말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김일성 생가'에서도 확연히 느꼈지만 북한 사람들의 마음과 그 마음이 발현되는 행동에
한결같이 하나의 거대한 '중심'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김일성 전 주석에 대한 경외심과 충성심이다. 생가를 소개하는 여성 안내자들이
설명 중간 중간 울먹거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소개하는 모습에서 더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존재였기에 '그'가 태어난 이곳 생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의 순례지이자
성지와 다름없었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아침지기 최동훈 팀장이 농담으로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김일성 주석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있다"고...무슨 소리냐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는 "그 '어딘가'는 바로 '인민들의
가슴 속'이다"고 말해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했다.
우리 한국에서는 하나의 농담에 그쳤던 그 얘기가 북한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하나의 굳은 신앙이자 현실이었음을
방문 기간 내내 절감하게 되었다.

이념적, 사상적,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인 것들에 대한 일체의 속박 없이,
더구나 5공화국 이후 자유에 대한 억압이나 삶의 방향에 대한 강요를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이 살아온 나에게, 북한은 존재 모습 그 자체로 '나'를 얼마간 혼돈케 했다.

북한은 분명 변하고 있었다. 이번 방문자 중 몇 차례 북한 방문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한결같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해주셨고, 실제로 안내자들의 언행, 식당 종업원들의
서비스, 평양 시내의 면모 등등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밝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의 첫 방문으로 그 변화의 양상을 잘 모르는 '나'에게 북한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은 그리 실감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북한 사회의 깊숙한 곳에서 오래도록
흐르고 있는 '중심'과 '본질'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것이 '나'를 혼돈케 했던 것이다.

글 /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사진 / 윤나라 실장, 최동훈 팀장


인천공항에서 순안공항 평양거리풍경 만경대

대동강. 평양시내에서 만경대로 가려면 대동강변을 지나게 된다.
'대동교', '순안', '룡성'이라 적혀 있는 교통 표지판이 보인다.



대동강의 모습.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이 '동평양'이다.



대동강 '뱃사공'. 노를 저어 배를 모는 주민들의 모습이 옛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강건너 보이는 '쑥섬'.
1948년에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석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 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통일전선탑을 세워 놓았는데 당시
참가했던 단체와 개인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놓았다고 한다.



대동강변에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북녘 주민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만경대 김일성주석 생가 앞.
아름드리 나무가 심어져 있다.



남측에서 온 손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맞아준 북측 안내원.
만경대에 대해 감정을 깊이 담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김주석 생가 앞에 세워져 있는 붉은 글씨의 비석.



생가의 입구 모습.



열성을 다해 설명하는 안내원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생가의 큰 방 모습. 장롱과 책상이 놓여 있다.
벽에는 어린 시절의 김일성 전 주석과 부모 사진이 좌우에 걸려 있다.



생가 한 켠에 전시되어 있는, 그 당시 사용했다고 하는 농기구들.



북에서는 김일성주석의 흔적이 남은 것은 멍석이든 무엇이든 매우 중요한 유품이 된다.



커다란 항아리와 키 등이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함께 전시되어 있는 물동이.



'만경대고향집' 비석 앞에서 북측 안내원과 함께 기념 사진.


생가 바로 옆에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우물이 있다.
더운 날씨를 식혀 주는 아주 시원한 물맛이었다.
초록색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방송인 정재환님.



만경대의 정상 지점에 '만경대'라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다.
만경대라는 이름은 '만가지 경치가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만경대 위에서 동평양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만경대'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



기념품 상점에서 물건을 판매하고 있는 여점원.
물건을 살 때에는 유로나 달러로 구입할 수 있다.




만경봉을 내려 오고 있는 방북단.
'만경봉1상점' 이라 간판 붙여진 상점이 보인다.





만경대는 커다란 수목원이기도 하다.
잘 조성된 숲과 나무 속에 산책로가 잘 놓여져 있다.
고도원 이사장님과 최동훈 팀장이 잠시 뒤를 돌아보는 사이에 한 컷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