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미대학교의 의미 있는 졸업식 행사를 무사히 마친 다음날,
일행과 함께
이곳 쿠미 지역의 '교육타운'을 둘러보게 되었다. 기아대책기구가 하고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이 바로 CDP(Child Development Program)이다. CDP는 국내외 어려운
아이들과
'1 대 1'로 후원결연을 맺어 한 달에 2만원씩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이 CDP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학교와 후원아동의 집을 둘러보는 것도 이번 아프리카 방문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1997년부터 이 지역의 지도자들과 한국에서 건너간 선교사님들이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중, 고등학교 등을 설립하자는데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주민들과의 회의 끝에 4만평이 중, 고등학교
땅으로, 2만 5천 평이 초등학교 땅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집집마다
1달러씩을 모아서 3,000달러 정도의 돈을 모금했다. 그리고는 바로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정도의 돈으로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 기아대책을 위시한 여러 개인과 단체들이 지원에 참여했다.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님이 회장으로 있는
기독교연예인선교단에서도 학교 건축을 위한 지원금을 보내 현재 500 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지금의 학교를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연예인선교단에서는 현재까지도 꾸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했다.
류형열 선교사님뿐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세계 오지의 어려운 곳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쿠미 대학'까지 세워졌고, 말 그대로 쿠미가 한국인들에 의해 조성된
'교육타운'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쿠미 지역 내 은예로(Nyero) 마을에 위치한 몇 군데 학교 중 우리가 방문한 곳은 '조이 크리스챤 학교'라는
곳이었다. 역시 특별한 소명감으로 아프리카에 온 한국인 선교사 김순옥님이 1998년에 설립한 곳으로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
이 초등학교에서도 2003년부터 기아대책 CDP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첫 해 76명의 아이들로 시작해서 현재는 700여명의 어린이가 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가운데 CDP후원 어린이는 에이즈 어린이 50명을 포함해서 약 300명이며,
100명 정도가 추가 후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이 크리스챤 학교를 방문하자 근처 몇몇 학교에서 CDP 후원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김순옥 선교사를 비롯한 이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정성스럽게 준비한 '학예발표회'를
구경할 수 있었다. 우렁찬 합창과 노래, 춤 등의 공연이 한동안 이어져 보는 이들을
아프리카의 흥겨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
숯처럼 까만 얼굴에 언제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환호하고, 우리를 에워쌌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많이 당황이 됐었다.
특히 우리의 위생 관념과는 너무 다른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내민 손을
선뜻 잡기가 어색했지만 이내 난 그들의 거친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 수 있게 되었다.
학교 방문 다음 일정은 CDP 후원 대상 아이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30 여분 간 황톳길로 달려 인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
더는 차로 들어갈 수 없는 길이어서 일행들이 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에 타 있을 때는 잘 보이지도 않던 그런 곳에 마을이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하기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움막이 여러 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CDP 후원 대상 집은 엄마가 가장이었다.
그녀는 1988년 남편을 잃고, 5명의 자녀를 어렵게 어렵게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약간의 정신지체도 있다고 했다.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다섯 자녀의 아버지가
다 다르다는 말을 듣고 충격 아닌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집안에는 빨래 줄에 걸린 옷가지 몇 점과
물통 몇 개, 그리고 항아리에 나무 뿌리, 그리고 계란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해 보이는
비쩍 마른 닭 한 마리가 전부였다. 그 집과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참으로 난감했다.
아프리카의 그 넓은 땅에서 기본 생활은 물론이고 문명의 혜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이 곳의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너무도 막막하게 다가오는 절망감 앞에 뭔가를 하기 위해 섣불리
발벗고 나서기가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나를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방문에서도 보았듯이 이런 절망의 상태를 절망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특별한 소명감과 함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헌신과 봉사,
심지어는 목숨까지 거는 사투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 저곳에서 엄청난 변화와 기적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참으로 특별한 감동을 심어준 장소를 찾아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다 숨진
두 명의 한국인 선교사의 무덤이었다. 돌산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벌써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먼저 찾은 것은 안용석 선교사의 무덤이었다. 선교를 위해 이곳에 온 지 두 달 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는 당시 28살의 대학원생이었다.
28살...대학원생...두 달 만에...그의 짧은 인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교통사고...갑자기 아찔한 순간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첫날 우간다에 도착해서 쿠미로 오던 길, 우리를 태운 차를 몰던 우간다 청년의
운전 솜씨가 어찌나 거칠고 난폭하든지 사진을 찍기 위해 운전자 옆 자리, 곧 맨 앞에
앉아있던 나는 마주 오던 차와 충돌한 뻔한 위기의 상황에 여러 번 맞닥뜨려야만 했다.
이동 중간쯤에서 대형 사고까지 목격해서였는지 안용석 선교사의 죽음의 원인이
교통사고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슬픔에 앞서 오싹함을 안겨주었다.
그의 무덤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있었다.
그 무덤의 주인은 20살 때 이곳 우간다에 들어와 1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난 주윤정 선교사였다. 작렬하는 적도의 태양볕 아래
홀로 외로이 누워있는 그녀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그녀의 짧은 생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같이 손에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기아대책 정정섭 회장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다른 여러 어려운 나라에 나가 힘겹게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떠올라서였을까.
당신의 딸 혹은 아들처럼 여겨졌기 때문일까. 기도하시는 정회장님의 떨리는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했다.
이곳 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도원 홍보대사의 오열하는 모습,
몇 년을 함께 했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작년에 주윤정 선교사의 부모님들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했다.
딸의 무덤 앞에서 아무 말씀도 없이 몇 시간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 가셨다고 했다.
24시간을 와야만 어렵게 만날 수 있었던 딸의 무덤 앞에서 그 분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보려 했지만, 포기했다. 그 분들의 찢어진 가슴을 감히 상상하려 했다는 것조차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그녀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깊이 슬퍼하고 오열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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