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우간다에 도착한 후 맨 먼저 참가한 첫 공식 행사는
쿠미라는 곳에 세워진 '쿠미대학(Kumi University)'의 제1회 졸업식이었다.
'쿠미'는 수도 캄팔라에서 북동쪽으로 380km 떨어진 시골마을로 예전에는 거의 허허벌판에 가까웠지만
쿠미 대학이 들어섬으로써 여러 변화의 물결이 출렁대고 있었다.
아침편지 문화재단 이사장이자 기아대책 홍보대사이신 고도원님과
기아대책의 정정섭 회장님,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과 함께 엔테베 공항에서 캄팔라로,
캄팔라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5시간 넘게 달려 쿠미에 도착했다.
'쿠미대학'은 우간다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대학이다.
풍부한 지하자원, 자연환경, 건장한 신체, 넓은 땅 등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우간다지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극심한 가난과 기근으로 더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내전이나 근원적인 물 부족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땅을 잘 다스리고 경작하는 이상적인 농업 개발 모델과
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이기도 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쿠미에 '류형열'이란 이름의 한 전설적인 한국인 선교사가 등장했다.
그는 서울대 농대를 나와 특별한 소명으로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에 들어와 처음에는 빈 벌판에 바나나를
심어 주민들의 소득을 올리고, 다음에는 '아프리카 지도 훈련원'(ALTI: Africa Leaders' Training
Institute)에
이어 '은예로 고등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우다가 1999년 마침내 쿠미 대학을 설립했고,
올 1월 우간다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대학 인가를 받아 첫 졸업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2005년 현재 50여명의 교직원과 1,000여명의 학생들이
지역개발학, 경영학, 사회복지학, 교육학, 컴퓨터학 등의 과목을 공부하고 있다.
'쿠미 대학' 덕분에 쿠미 지역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허허벌판에 없던 도로가 뚫리고
'교육촌'이 생기고 호텔이 들어섰으며 사람들의 일자리도 많이 생겨났다.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쿠미 대학'은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단순한 삶에서 다채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었으며, 주어진 대로만 살아가던 생활방식에서
자신이 직접 생산하고 창조하여 그것을 남에게도 베풀 수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떠돌이 유목민이 아닌, 한 곳에 정착해서 뿌리 내리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터득하게 해주었다.
짧은 시간에 어느덧 이 지역 최고의 학교로 자라난 쿠미 대학은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이곳 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로서 잃어서는 안될 도전 의식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며 이뤄내고 또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과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는 소중한 장이 되었다.
어찌 보면 쿠미 대학의 모형이 우리나라의 연세대 설립 배경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정말 미지의 땅이었던 한국에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 가족이 그의 신앙과 소명감 하나로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길러내어 이제는 한국의 일류 명문대학으로 자리잡았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언더우드'라는 이름이 전설처럼 남아 있지 않은가.
언더우드가 만일 돈을 벌 목적으로, 아니면 그저 단순한 명예 때문에
그 어려운 시절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높은 존경심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더우드 가문 사람들을 '시혜자'가 아닌 '동반자'였다고 회상하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류형열 선교사가 고 원한경(언더우드 1세의 한국이름)님과 겹쳐져 오버랩 되는 건 그리 생뚱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류형열님이 현재 안식년을 얻어 한국에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이날 졸업식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제 1회 졸업식에서는 600여명 정도가 학사모를 썼다.
영부인까지 참석한다더니, 역시 그 격조에 맞게 두루 잘 갖춰진 졸업식장이었다.
한국인이 세운 학교라서 그랬는지 천막과 의자들, 그리고 귀빈석이 정말 우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밴드와 무용단의 축하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전주 바울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이 졸업식에서
총장으로 취임하게 된 원팔연 목사님의 취임식까지, 식은 매끄러운 듯 잘 진행되었으나
기대했던 영부인 대신 문교부 차관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고, 총장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전이 되어 마이크가 꺼지는 일이 있기도 했다.
무지막지한 더위에 학사모를 눌러쓰고, 두꺼운 졸업식 가운을 입고, 천막 아래 그늘에 앉아 있는 졸업생들...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을 뜨고 있어도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카메라 앵글로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 색뿐이었다. 검은 얼굴에 검은 학사모, 검은 가운 때문에 천막 안이 온통 검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빛나는 눈과 웃을 때마다 비치는 하얀 치아는
그들의 자부심과 성취감을 대변해주고도 남았다.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돌다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졸업식에 참여하고 있었고,
학교 밖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졸업하는 사람은 성취감으로,
가족의 졸업을 보러 온 사람들은 축하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구경 나온 사람들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한마디로 온 동네 축제 마당이 된 듯했다. 다만 학교 안의 졸업생들의 얼굴에서 자부심과
당당함이 엿보였다면 학교 철창 밖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표정에서는 부러움과 경외심,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벌어진 학력 차이에 대한 자괴심 같은 것이 배어 나오는 듯 느껴져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도 몇 가지 있었다.
먼저 이곳 사람들의 시간 관념 부분인데, 9시에 시작한다고 하면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사람들이 다 모이고, 그나마 '높은 사람'들은 그보다 30분 또는 1시간 뒤에야 나타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연설 시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연설이나 강연 등을 할 때,
예를 들어 30분이 주어졌다고 해서 30분에 마치게 되면 오히려 실례가 된다고 했다.
주어진 시간만 달랑 지키면 자기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3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의 연설문을 준비해야만 한단다.
처음엔 설마 설마 했지만 졸업식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넘어 갈 땐 그 말을 온 몸으로 실감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야 그렇다쳐도 귀빈석에 앉아 계신 고도원 홍보대사 등 한국 손님들은
찜통 같은 천막 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시종 젊잖고 진지하게 그대로 앉아 자리를 지키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인상적인 것 중의 다른 하나는 냄새에 관한 것이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들만이 가진 특유의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 아프리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위와 싸우는 사람들의 체취랄까. 물 부족으로 인해 오래 씻지 못한 데서 나오는, 강렬한 냄새...뭐랄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도 여름철에 간혹 풍겨나오는 '암내'라는 것과 견주면 실감이 날까?
그 냄새가 솔직히 말해서 어찌나 강한지, 누군가 나에게 반갑게 다가와서 악수를 청할 땐 겁부터 났다.
반갑게 인사를 청한 사람들이 내 표정에서 "당신에게 냄새가 나요"라는 느낌을 받을까 봐
작은 행동이라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묘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한국인인 나의 체취도 그들에겐 지독한 마늘 냄새 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는 생각과
그들의 그 지독한 냄새가 그 사람들의 문화와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올 거라는
생각이 드니, 어느덧 조금은 순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는 어떤 것이 됐든
싫지 않듯이 마음을 열고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하니
그 냄새도 그리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또 한가지 유쾌한 인상을 받은 것이 있는데, 그건 사회자가 졸업생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를 때마다
그 해당 학생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괴성'과도 같은 그들만의 특유의 목소리로 축하를 해주는 장면이었다.
"이~~라이~라이~라~라~이"
목젖 근육을 찢어내는 듯한 하이톤으로, 여성들만이 외치는 카랑카랑한 응원의 소리, 축하의 소리였다.
아무튼 사람 기분을 띄워주고 즐겁게 해주는 무슨 마법사의 주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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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다음날 우리 일행은 쿠미에서 자동차로 두 세시간 거리에 있는 한 작은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인터넷 카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오지까지 뻗어있는 인터넷의 무서운 힘을 절실히 느끼며,
고도원님과 함께 그 카페에 들어가 아침편지 홈페이지의 접속을 시도했는데 한글이 깔려 있지 않았다.
서울에서 가져간 노트북조차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알고 난감해하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한글을 깔아주는 것이 아닌가.
고마워하는 우리에게 그는 "쿠미대학을 다녔고 바로 어제 그 학교를 졸업했다"며
"졸업식에 오셨던 분이 아니냐"고 인사했다. 인터넷이라는 첨단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
바로 어제 그 쿠미대학을 졸업한 학생이었다니...쿠미대학이란 곳이 왜 중요한 학교이며
장차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학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하는지 절절히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우연히 만난 이 곳의 인재들이 쿠미대학교 출신이라는 것 하나로 이런 뿌듯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류형열이라는 한국인 한 사람의 헌신과 불굴의 의지가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조금씩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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