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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제] ‘메일 한 통’이 안겨준 연해주 청국장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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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마을 지원위한 청국장 사업, 유통망 없어 몇 년 고전‘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소개되면서 주문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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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청국장을 아시나요?”
러시아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이 만든 청국장이 지난 5개월 동안 무려 19톤이 팔리면서 대박 행진을 터뜨리고 있다.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의 자회사인 ‘바리의 꿈’이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만든 이 청국장은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손잡고 쇼핑몰인 ‘꽃피는 아침마을’에서 이 같은 성과를 올렸다.
- ▲ 연해주의 콩밭 photo 바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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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이유는 우선 품질을 들 수 있다. 농약을 칠 필요도 없는 광활한 연해주 대지에서 자연농법으로 지은 콩으로 청국장을 만든 것이 성공 스토리의 기본 토대다. 그러나 품질이 우수하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결정타는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기자 출신의 고도원씨가 날렸다. 그는 지난해 10월 17일 당시 180여만 회원 앞으로 발송한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연해주 청국장을 먹고 지병인 위장병을 고쳤다는 내용을 띄웠다. 고씨는 예전에도 자신이 직접 상품을 써본 후 체험담을 아침편지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사실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손잡기 전에는 연해주 청국장의 판매 실적이 매우 저조했다. 우수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안정적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해 처음 판매를 시작한 2005년 10월부터 2007년 9월까지는 월 매출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100만원을 넘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연해주 청국장이 소개된 후 주문이 폭주하면서 한 달 만에 무려 15톤의 주문량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금까지 약 19톤을 파는 실적을 올렸다. 총 매출액이 3억원을 넘는다. 900㎏ 정도만 준비해 이것만 다 팔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두들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창출된 수익은 고려인 가정당 약 150만원 정도의 수익을 안겨 주었다. 월평균 수입이 200~300달러(18만8800~28만3200원)인 것을 감안하면 겨울철의 부업치고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 예상밖의 성과를 올리자 연해주 동포들도 신이 났다. 초기에 13가정만 참여하던 것이 이제는 60여가정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인의 이런 자활활동을 돕는 단체가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cafe.daum.net/we koreanwoo)’라는 곳인데 ‘바리의 꿈’은 이 단체의 자회사로, 재외 동포와 경제·문화 등 다방면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기업이다. 크게는 먹거리 유통과 청소년의 평화 교육 등의 사업을 하고 있지만 연해주 지역에 고려인 동포들을 중심으로 농가를 지원하는 등 지역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도 받았다. 사회적 기업이란 취약계층에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을 말한다. 일반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수익창출 등의 영업활동을 수행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런 기업이 55개가 있는데 ‘바리의 꿈’도 그중 하나이다.
‘바리의 꿈’이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함께 하게 된 데에는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하는 ‘노블하우스’의 류재관 대표의 역할이 컸다. 동북아 문화재단의 이사였던 류재관 대표가 고도원씨와 특별히 알고 지냈던 것은 아니지만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같이 집 짓기 운동을 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며 직접 아침편지 측에 제의를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바리의 꿈 청국장은 고도원씨에게까지 알려지게 됐다.
알려지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하루는 류재관 대표가 고도원씨에게 연해주에 다녀왔는데 유채꽃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고도원씨는 “그저 장관이라는 그 꽃밭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콩 얘기는 듣지도 못했죠”라며 아침편지 식구들과 바로 연해주로 답사를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보던 중에 우연찮게 콩밭을 발견한 것이다. “콩밭을 봤는데 콩과 잡초가 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비료도 안 주고 농약도 안 준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콩이 정말 건강한 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내도 청국장을 너무 좋아하고 언제나 좋은 콩을 찾기를 원했는데 비로소 찾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콩을 가지고 청국장을 만들면 최고 품질의 청국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차가버섯이 많이 자라는 곳이다. 당뇨병과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차가버섯 진액을 섞으니 몸에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케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적당한 유통경로가 없어 이 좋은 제품이 국내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바로 구상에 들어갔다. 제품을 재디자인해 ‘꽃피는 아침마을’에서 ‘연해주의 아침 고려인 차가 청국장’의 판매를 시작했다. 회원들에게 청국장이 몸에 좋은데 드디어 좋은 콩을 발견했다며 이 청국장을 먹으면 건강도 챙기고 연해주의 고려인을 도울 수 있다는 메일을 보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 ‘바리의 꿈’황광석 대표
photo 조영회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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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의 꿈’ 황광석 대표는 2년 전에도 청국장의 유통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유기농 먹거리 전문 기업에 들고 갔었다. 자신 있게 제품에 대해 소개를 했는데 단번에 거절을 당했다. 수입품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한국 농가를 보호하려는 차원도 있기 때문에 이해는 하지만 재외 동포가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이제는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도 받았으니 다시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황 대표는 청국장이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해 재단에 도움이 될 법도 한데 그래도 항상 부족하다고 한다. “원래 ‘동북아 평화연대’는 회원들이 출자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따로 공식적으로 지원을 받거나 하진 않습니다. 청국장이 어느 정도 팔리긴 했어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정말 필요할 때는 주위에 요청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판매수익을 통해 자립구조를 유지하려고 한다.
청국장을 통해 웬만큼 자리를 잡은 ‘바리의 꿈’은 지금까지는 먹거리 사업에 더 매진했지만 이제는 ‘청소년 평화학교’ 사업에 조금 더 신경 쓸 예정이다. “해방 이후 남한은 대륙으로부터 봉쇄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고구려, 발해 시절의 대륙적 기질을 잃어버렸지요.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면 부족한 식량 공급과 에너지 자원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서는 ‘대륙의 꿈’을 다시 꾸어야만 합니다. 연해주는 양질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게다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관문이기도 하고요. 이 현장에서 대한의 청소년들이 타 민족과 평화 공존의 바탕 위에서 민족 정체성이라는 방향타를 움켜쥐고 망망대해 세계 속의 선진 동북아인으로서 출항할 소양을 키우는 체험 교육의 마당을 펼쳐 동북아인으로서 호연지기를 함께 키우고자 합니다.” 황 대표는 이르면 5월 중에 자체 브랜드를 걸고 사이트를 오픈할 계획이다.
- ▲ ‘꽃피는 아침마을’에서 판매 중인 연해주 청국장.
photo 꽃피는 아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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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는 우리나라의 ‘바리 공주 신화’에서 인용했다. 한 임금이 딸만 연달아 6명을 낳았는데 7번째도 딸을 낳자 버리라고 했고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이 바리공주가 됐다. 그런데 임금님이 죽을병에 걸려 생명수가 필요하게 되자 6명의 딸들은 가지 않았지만 바리공주가 자처해 힘들게 구해 왔다. 온갖 고난과 수난을 넘어서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의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고려인 동포들의 운명이 그랬죠. 독립 운동하다가 조국에서 쫓겨나고 연해주에서 20만명 정도 한인촌을 형성하고 살다가 1937년에 강제 이주를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중앙아시아까지 가서 개간하고 사는데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고려인 동포들이 닦아온 기반들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연해주로 역(逆)이주 왔지요. 그분들이 이제는 조국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연해주가 식량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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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원의 아침편지 |
주변에 이메일 보내면서 시작 6년 만에 회원 190만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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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원씨가 독서하며 밑줄을 그어 놓은 인상적인 글귀에 짧은 코멘트를 달아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배달한 것이 ‘아침편지’의 시작이다. 2001년 8월에 처음으로 이메일을 발송한 이후 지금은 190만명이 넘는 아침편지 가족이 매일 아침 고도원씨가 신간 서적의 내용과 독후감을 소개하는 편지를 받고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는 편지가 아침마다 이메일로 배달되는 마음의 비타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비타민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비타민이듯 바쁜 생활 속에서 한 박자 쉼표가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회원들을 기반으로 온라인 쇼핑몰 ‘꽃피는 아침마을’도 운영하고 있는데 유기농의 좋은 먹거리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명상센터 건립도 진행 중이다.
그는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의 편집장을 맡았고 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연설을 담당하는 비서관을 역임했다.
| 연해주 고려인 이주사 |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곳곳에 흩어져 구소련 해체 후 한인 차별 피해 다시 연해주로 역이주
독립운동을 하다가 쫓겨나 연해주에 둥지를 틀고 살던 약 20만명의 한인들은 1937년 9월 소련 정부로부터 갑자기 간단한 옷가지와 돈만 챙겨서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 길로 10만여명의 고려인들은 행선지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한 달여간의 장정을 시작했다. 기차 안에는 화장실도 없고 음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렇게 달려 살아남은 자들이 도착한 곳은 낯선 중앙아시아의 겨울 들판. 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해도 수용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몰려 대부분 이주민들은 토굴을 파고 살았고 그 겨울에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고려 사람은 바위에 올려놔도 풀이 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듯이 한인들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벼농사를 시작, 중앙아시아를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목화 등 다른 작물에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나갔다. 한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근면성, 농업기술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그러나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신생독립국들의 독립은 50여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온 한인들에게 새로운 시련의 계기가 됐다. 자국 민족 언어 정책과 민족주의 등이 출현하면서 한인들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많은 한인들이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던 중앙아시아를 떠나 선조들의 원조 거주지였던 연해주로 역이주하고 있다.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손유정 인턴기자·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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