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또 한명의 특별한 사람이 있다.
'태'씨 성을 가진 고려인 '태바짐'이다.
그는 우리가 우즈베키스탄에 머무는 동안 계속 운전하고, 안내하고,
통역까지 맡아,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첫 인상부터 웬지 친숙해 보였던 태바짐에게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 얘기,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한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이기도 했다.
태바짐의 할아버지 성함은 '태남길'.
그는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하에 러시아 하바로스크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듯 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중앙 아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또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피땀흘려
일궈놓은 것들을 하바로스크에 고스란히 남겨놓고 강제 이주 열차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우즈베키스탄.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우즈벡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다.
얼어죽은 사람, 병들어 죽은 사람,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구사일생으로 우즈벡에 이주한 후에도 할아버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5년이 지나 이곳 생활에 막 적응해가던 1942년 시베리아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유는 성 때문이었다. '태'가 러시아 발음으로 '트하이'라고 불렸고, 이런 성은 한국에 없다는
이유로 중국인으로 오인받아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동안 시베리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죽도록 고생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당시 함께 끌려갔던 13명중 단 3명뿐.
이 부분에서 나는 가슴에 아찔한 통증을 느꼈다.
말이 시베리아 감옥이고, 10년동안이며, 13명중 3명이지, 할아버지가 그 당시 겪어냈을 고통을
생각해보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가슴 깊은 곳을 후벼파는 듯 했다. 그저 살아 돌아오셨다는
사실이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는 완전히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도 반드시 돌아올 거란
믿음 하나만으로 자신을 기다린 할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 또한 할아버지의 기구한 운명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할머니의 이름은 '천알렉산드라'. 중국에 맞닿은 북한의 어딘가에서 살았었는데, 노름빚을 진
전 남편이 중국사람에게 팔아넘기고 말았다. 3일동안 중국 사람의 집에 갇혀있다가 무작정
하바로스크쪽으로 도망쳐 나와 할아버지를 만났고 1930년쯤 두번째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우즈벡으로 이주한 후 기약도 없이 10년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화 또는 소설에서나 가능한 얘기같았다. 언젠가 TV에서 당시 고려인 이민자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을 뿐, 이렇게 그 당시 실제 주인공의 손자인 3세에게
직접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바짐의 얘기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강하고
깊숙하게 전달되어 왔다.
태바짐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막내 손자인 태바짐을 특별히 이뻐해주신 자상한 할아버지는 태바짐이 10살정도 되던 해인
1976년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는 1994년 7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우즈벡 이주 당시 어린 아이였던 태바짐의 아버지 '태니콜라이'님은 현재 70세로,
타쉬켄트에서
자동차로 30분정도 거리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돼지, 닭 등을 기르고 밭도 일구며
어머니와 함께 살고 계신다. 태니콜라이님은 40대부터 한글과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한국책이 거의 없었고 거의가 북한책이었다.
그렇게나마 혼자서 독학한 아버지는 태바짐에게 "너는 한국 사람이니, 한글 공부를 해야한다"며
한국어 공부를 강조하곤 하셨다고 한다.
현재 우즈벡에는 20만이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다.
러시아말을 주로 사용하던 그들은 소련이 집권하던 시절엔 꽤 번영을 누렸었지만 소련붕괴
이후의 삶은 처참할 정도로 나빠져만 가고 있다. 단순한 언어 차원의 문제를 넘어 우즈벡
사람들의 따돌림 속에 거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 어려움에 놓여진 고려인 가운데 한 사람, 태바짐.
그는 정송현 장로를 만나 꾸무쉬칸 농업훈련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3년전부터는 기아대책기구
(FHI)에서 사무총장 일도 맡게 되었다. '벧카밧'이란 곳에 위치한 장애 학교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그 장애 학교를 담당하는 매니저로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학교 이곳저곳을
함께 둘러보는 태바짐에게서 부드럽지만 강인하고 차분한 면모가 엿보였고, 믿음직함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태바짐에게 의미있는 씨앗이 하나 뿌려졌다.
태바짐의 이야기는 한 권의 소설책도, 한편의 영화도 아니었다.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개인의
역사이자, 민족의 역사였다. 고려인 3세, 태바짐 같은 사람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그가
남기지 않으면 마른 풀잎처럼 흩어지고 말, 너무도 중대한 한민족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고도원 홍보대사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가슴에 뿌려진 씨앗은 특별했다.
빡빡한 일정 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태바짐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듣던 고도원님이
그와 헤어지던 날, 이렇게 말했다.
"기록하십시오.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흩어지고 잊혀지게 됩니다.
기록하고 나면 그것은 바로 역사가 됩니다. 당신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그 분들에게는
분명 고통이었지만 당신에겐 엄청난 유산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신적인 자산이 될 수 있고, 그것은
곧 민족 전체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당신에게 특별한 사명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반드시 기록해서 그것을 책으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하십시오.
나에게 얘기를 털어놓은 순간부터가 바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는 한 마디 약속까지 덧붙였다.
시골에 건강히 살아계신 부모들의 얘기를 더 세세히 녹취하고 주변 자료를 더 많이 조사하여
기록만 잘 해놓는다면 그것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적극 도와주겠노라고...
태바짐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언가 잃었던 길을 찾은 듯 반짝이는 그 눈빛에서 나는
그의 생각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태바짐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인의 뿌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계신 아버지와 함께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버님에게도
정말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바짐은 4년 전인 지난 2000년에 한국을 일주일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태'씨의 본이 전북 남원쪽이라서 "고향이니까 꼭 한번 가봐야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마음먹고
전주와 남원을 돌아봤다고 한다.
"고향을 처음 가보신건데... 어땠어요?" 내가 물어봤다. "매우
좋았다"고 짧게 대답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할아버님이 왜 이 좋은 곳을 떠나 러시아로 가야만 했는지,
그런 의문을 품은 채 돌아왔습니다" 붉어진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던진 짧은 한마디가 또다시 내 가슴을 파고들어 아프게 했다.
그리고는 그의 할아버지가 겪었을 파란과 고통, 그로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태바짐과 그 가족들의
설움이 남이 아닌, 내 것처럼 느껴져 내 눈에도 작은 이슬방울이 맺혔다.
(일곱번째 여행스케치는 월요일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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