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의 키르키즈스탄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차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꾸무쉬칸'이라는 시골마을로 향했다.

타쉬켄트를 벗어나 꾸무쉬칸으로 가는 길은 이국적이기 보다는 마치 시골 고향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정겨웠다.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높은 산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경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의 삶도 중앙아시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둡기만 했다.

91년 소련 붕괴로 갑작스럽게 독립한 나라, 우즈베키스탄.
농업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농촌은 빈곤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화학비료와 고엽제등의 농약제를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해 수질오염과 환경오염도 심각해 있었다. 농민들은 그 때문에 갖가지 질병을 얻고
치료도 받지 못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시골 마을 '꾸무쉬칸'에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정송현 장로가 그 주인공이다.
그 분은 일찌기 8년여전에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이곳에 들어와 '농업훈련원'을 세웠다.
땅을 개간하고, 물을 끌어오고, 중고 컴퓨터를 들여와 컴퓨터를 가르치고, 영어교사를 초빙해 영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여기서 교육받은 현지 젊은이들을 현지 교사로 내세워 주변 학교에 컴퓨터 야간 교실을 개설해
마을의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키르키즈스탄의 '추이 미래 지도자 학교'가 이제 막 시작하여 열매를 기다리는 곳이라면,
이곳 '농업 훈련원'은 8년전부터 뿌린 씨앗이 자라나 막 열매를 맺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송현님이 처음 이곳에 농업훈련원을 만들 때 이야기는 이미 이곳에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다.
주변에 물이 나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인근 주변을 살펴보니 훈련원이 위치한
산에서 5km 가량 떨어진 건너편의 높은 산등성이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그는 3km에 이르는 산 계곡에 플라스틱 수도관을 묻어, 물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이같은 작업 결과를 한국의 한 수자원개발 전문가가 와서 보고는 "이건 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무식한 사람이 호랑이도 잡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느냐"며 웃어넘겼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어렵게 땅에 묻은 풀라스틱 수도관은 다행히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없이 잘 작동하여 훈련원의 가장 필요한 시스템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곳 주민들의 소중한
젖줄이 되었다. 이런 그의 행적은 지방정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어냈고, 답례로 황무지 10만평을
50년간 무상으로 임대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대단한 분이셨다.

그 정송현님 밑에서 교육받은 28살의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가일아트'. 아내와 두 자녀를 둔 가장이며, 이곳 훈련원에서 공부도 하고 노동일도 맡아 하고 있는 청년이다.
우리가 그를 만난 것은 훈련원 담벽을 놓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공사현장이었다.
가일아트는 키도 훤칠하니, 인물이 꽤 잘생긴 건장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꿈도 희망도 없는 청년이었다.
술, 마약, 담배에 얽혀 정신이상 징후까지 보이던, 말그대로 막 나가는 청년이었다.
어느날 정송현님이 세운 '농업훈련원'에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일과 공부를 하면서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술, 담배를 끊고, 마약도 어렵게 끊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는 이곳에서 교재로 쓰고 있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슬람 문화권인 그 주변의 친구와 마을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심지어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매일 싸우는게 일이었다.

나중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마을에서 '인민재판'을 받게 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모슬림 사회에서 기독교 개종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일아트는 같은 훈련원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또 다른 청년과 함께 주민들 앞에 섰다. 가일아트보다 먼저 불려나온 그 청년은 평소 가일아트보다 더 열심히,
더 공부를 많이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을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어 위기를 모면했지만
가일아트는 달랐다. 그는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입을 연 뒤 자신이 이 훈련원에서
받은 교육으로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설명하더니, 기독교로의 개종 사실을 담대하게 밝혔다고 한다.

당연히 그로 인한 핍박이 대단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용기를 평가하기 시작했고,무엇보다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편이 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를 불신하던 아내도 바뀌었다.
그를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그날 그의 아내 '나르기자'도 만날 수 있었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의 그녀는 우리네 표현을 빌리자면 부잣집 맏며느리감같은 후덕한 인상이었다.
첫 인사를 나누던 수줍음은 어느정도 대화가 진행되자 점차 사라졌다. 나르기자는 " 남편의 용기를 통해
두려움과 모든 근심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가 매우 편안해 보였다.

그 일을 계기로 가일아트는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내와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할 가장인 현재의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그야말로 불가능한 꿈이었다.

고도원님이 그에게 "무슨 공부를 하고 싶고, 공부를 마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신학 공부를 해 목사가 되어 이슬람권 모슬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도원님이 놀란 눈으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가일아트의 지도를 맡고 있는 이영우님에게 다시 물었다.
"이곳에서 생활비 걱정 없이 가일아트가 공부를 하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합니까"
"한 달에 100달러면 충분합니다."

그 자리에서 '특별한 인연'이 생겨났다. 고도원님이 그가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목사의 직분을 얻는 그날까지
학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누구보다 큰 용기, 그리고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가일아트에게
꿈과 희망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진짜인지 얼른 실감하지 못한 듯 쑥쓰럽게 웃는
가일아트의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나르기자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르기자였기에 고마움이
훨씬 큰 듯했다. "뒷바라지를 더 잘 하겠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새로운 도전의 의지가 엿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져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누군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일 계속 됩니다)

-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에서 꾸무쉬칸으로 가는 길.
멀리 하얀 눈이 쌓인 산이 보인다.




꾸무쉬칸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시골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꾸무쉬칸. 눈 덮인 산밑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점심식사. 정송현 장로댁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한식이 더없이 반가웠다.



브리핑. 훈련원 곳곳에 정송현님(가운데)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



즐거운 영어시간. 현지 청년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



훈련원 학생과의 대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던 한 학생과 반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고도원 홍보대사.




목장, 마을 그리고 만년설산. 경치도 좋았고 공기도 상쾌했다.



산등성이 마을. 산등성이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있고 집마다 경작지가 있다.
이곳에 물을 훈련원에서 대주고 있었다.




마을의 원로들. 한때는 핍박을 주는데 앞장섰던 노인들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꾸무쉬칸 학교. 컴퓨터 교실은 저녁시간에 문을 연다.



컴퓨터교실. 기아대책기구에서 기증한 컴퓨터로 채워져있다.
이곳 아이들이 컴퓨터란 것을 거의 처음으로 접한 곳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훈련원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다.




'사랑의 PC보내기'라 적혀있는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에선 처리 곤란한 286컴퓨터가 이곳에선 요긴하게 쓰인다.




컴퓨터 수업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가일아트와의 대화. 자신의 얘기를 담담히 풀어놓고 있는 가일아트(맨 왼쪽).
맨 오른쪽은 가일아트의 지도교사인 이영우님.




새로운 꿈이 생긴 가일아트.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가일아트의 아내, 나르기자. 미소가 아름다운, 순박한 시골 아낙의 정겨운 모습이다.



가일아트와 함께.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가일아트이다.



가일아트와 고도원님. 앞으로 함께 꿈을 이루어갈 두 사람의 미소가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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